Space of the other domain(다른영역의 공간)

 

공간의 조각, 공간의 거푸집

 

현대미술 칼럼니스트 노진구

 

제한된 공간의 의미와 시각적 은폐

 

내부에 공간을 가진 사물에 있어서 그것의 윤곽은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지 않는다. 간단한 이야기다. 우리에게 찻잔 하나가 있다고 치자. 그 컵에는 하얀 유약이 발라져 있거나, 손에 잡히기 수월하도록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손잡이가 달려 있을 수 있다. 잔 바닥이 원형이 아닌 네모난 형태로 만들어졌거나 실험용 플라스크처럼 아래가 넓고 윗면이 좁은 행태의 컵도 상상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컵의 의미는 컵의 안, 즉 무언가를 담고 꺼낼 수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 공간이 없거나 혹은 실질적으로 쓸 수가 없는 컵이라면 그것을 온전히 컵으로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컵은 공간을 둘러싼 외벽과 외벽으로 인해 제한된 공간의 결합으로 인해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직관적으로 파악되기 어렵다. 제한된 공간의 의미는 시각적인 직관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개념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컵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가장 많은 정보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위치를 취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컵의 외벽과 함께 구멍을 그려 넣음으로써 우리는 컵 내부의 공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컵의 빈 공간이 갖는 의미를 조금 더 실감나게 보여주려면 컵 안에 담긴 커피 등과 같은 액체를 함께 그려주면 더 효과적인데, 컵 안에 담긴 액체는 컵 내부의 공간이 변모한 하나의 양태로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집이나 자동차를 그릴 때-자동차나 집 역시 사람이나 물건을 담는 하나의 그릇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겉모습을 그린 그림 자체로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기 어렵다.

공간은 구획되고, 무언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님으로서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달리 말하면 공간은 외부로 무한히 확장될 수 없을 때 ‘밖’과 구별되는 공간으로서 특수한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은 ‘제한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이선구 작가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이 ‘제한된 공간’에 시각적인 형상을 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보인다. 이는 작가노트에서 작가 본인이 밝혔듯 남들과 다르기 보기 위해 먼저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면모를 버리고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보려는 시도와 연관이 있다. 실상 컵의 진정한 의미는 컵의 겉모습이 아니라 컵의 ‘비어있는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시각화하냐는 것이다.

 

공간을 드러내는 두 가지 방식

 

이선구 작가는 ‘제한된 공간’에 시각적인 주목을 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하나는 공간을 제한하는 프레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는 빈 공간을 가진 조형물을 만들고, 그것의 구조적 특징을 부각함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내부 공간이 갖는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로, 내부공간 자체를 시각화 하는 작업이다. 이는 마치 주물 작업처럼 빈 공간 자체를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 형태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외형을 가질 수 없는 공간에 형상을 부여하고 대신 공간을 제한하는 외벽을 제거함으로써 제한된 공간과 제한하는 벽 사이의 관계를 반전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제한된 공간은 더 이상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무언가가 채워진 상태로서 더 이상 공간으로서 기능하지 않게 된다. 나는 이를 ‘공간 보여주기’와 ‘공간 주물하기’로 나누어 설명하려 한다.

 

하나. 공간 보여주기

이는 공간을 제한하는 사물과 그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바깥에서 보이는 사물의 겉모습은 내부의 공간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도를 방해하는 가림막이며 동시에 그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감상자는 사물의 겉모습을 관찰하면서 그것이 갖는 내부 구조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내부로 통하는 공간은 조명 등의 장치를 통해 부각되는데, 관객은 이런 조명을 근거로 출구와 입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게 된다. 관객은 바깥에서 사물의 내부로 통하는 공간을 ‘들여다봄’으로써 제한된 공간이 갖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이 <제한된 통로>와 <제한된 공간>이다. 이 두 작품은 통로와 큐빅 형태의 구조물을 통해 내적 공간을 드러낸다.

<제한된 통로>는 반복적인 내부 장식과 미로를 연상시키는 설계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통로 안쪽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관객은 이 작품의 내부 구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입구와 출구를 희미하게 밝히는 조명이 이곳과 저곳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시적인 분위기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입구와 출구, 미로가 상징하는 문학적 장치가 개인이 갖는 서사를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제한된 통로>가 다소 서정적이고 내재적인 경향이 있다면, <제한된 공간>은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면모를 띤다. 제한된 공간의 ‘내부 공간’은 통로의 그것처럼 관객을 향해 열려 있지 않다. 시멘트를 부어 만든 작은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빛과 통로를 이용해 단지 내부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제한된 공간>은 구조 외에 모든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작업의 집중도가 높였고 동시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단순화했다.

 

둘. 공간 주물하기

내부 공간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선구 작가가 취한 방식은 내부공간을 제한하는 외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전자의 방법보다 공간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한다. 이선구 작가는 모든 내부 공간이 일종의 거푸집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것에 착안해, 공간의 거푸집을 만든다. 거푸집이 된 공간은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내부의 ‘빈’ 장소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 사물이 되며, 내부를 제한하는 틀로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사물의 외형은 제거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대표적인 예가 <파란방(Blue room)>이다. 이 작업에서 이선구 작가는 이중의 주물과정을 재연한다. 먼저 작가는 스티로폼을 이용해 주형을 만든 후, 플라스틱 주물(F.R.P.)를 이용해 트럭의 모습을 재현한다. 이때 재현되는 트럭은 차량의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공간의 외형이다. 즉, 트럭 내부 공간의 거푸집이 만들어진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트럭의 내부공간은 스스로가 제한하는 거푸집이 된다. 감상자는 창문을 통해 플라스틱 주물 안 공간을 감상할 수도 있고, 작품 자체를 통해 시각화된 트럭의 내부 공간을 보는 기이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공간을 제한하는 외벽이 사라진 형태에서 공간 자체를 ‘바깥’에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컵 안에 담긴 물을 보면서 컵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채 담겨져 있는 물의 형태와 물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만을 인지하는 것과 같다.

덧붙이자면 <파란방>은 작가의 연작인 <Real car>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다. 재현 대상이 자동차라는 점에서, 공간과 형태에 대한 주제의식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Real car>가 <파란방>과 연결돼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파란방>에서 보이는 작업적 성과와 달리, <Real-Car>에서 내부구조에 대한 고민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실 <파란방>은 <확장된 창(Extend window)>과 오히려 관계가 깊다. <확장된 창>에서 파랗게 칠해진 트럭 안의 내부 공간은 <파란 방>에서 3차원의 공간을 점유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독립된 작품이나, 각 작품이 서로의 이해를 돕는 상보성을 갖고 있어 이를 하나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